오스카의 겨울 애상(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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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플란트와 어머니의 팥호박죽’

1.우리의 소원

치과에서 임프란트 정기 검진  메시지가 날아왔다. 예전 회사 근처 치과라서 왠만해선 그 먼 곳 까지 가지 않는데 이 번에는 가야할것 같았다. 왼쪽 윗 어금니가 요즘 말썽이기 때문이다. 씹을 때 처음엔 묵직하다가 시큼하더니 지금은 흔들리는 것 같다. 가까운 치과에 가면 임플란트 치료는 원래 시술했던 곳으로 가라며 임시 처방만 해준다.

어금니 하나 흔들려도 이처럼 불편한데 평생 이 때문에 고생한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 온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때문인지 이제 나도 이가 하나 둘 씩 망가지면서 오래 전 내 어머니가 느꼈을 고통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30년 전 어머니 이 때문에 생긴 일화가 생각난다.

어머니는 생전 이 때문에 무척 고생하셨다. 내가 어렸을 적 아침에 일어나 보면 어머니는 부엌 아궁이 앞에서 뺨을 손바닥으로 매만지거나 손가락에 무언가를 찍어서 잇몸을 마사지 하면서 혼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잔 불을 아궁이 입구로 끌어 모아 분화구 형태로 만들고, 그 위에 스댕 대접을 올려 놓은 뒤 소금과 들기름을 붓고 그릇 안의 액체가 어느 정도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머니는 그 스댕 대접 속  액체를 엄지와 검지에 조금씩 찍어서 잇몸과 이빨을 꾹꾹 눌러 고루 마사지 하곤 하셨다. 요즘의 죽염 마사지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고도 치료 효과는 없었는 지 어머니는 40대 중반에 접어들고부터 앞니 위 아래가 하나씩 빠지기 시작하더니, 점차 나이가 더 들어가면서 나머지 이빨에도 탈이 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4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부터는 상태가 더욱 악화돼 50대에 벌써  틀니를 해야 식사를 할 수 있는 처지가 되셨다. 이가 나쁘니 영양 섭취가 어려웠을 것이고 일은 고대고 하니 남들 보다 20년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누구라도 빨리 돈 버는 사람이 어머니께 틀니를 해드리는 것을 묵시적 소원으로 삼았다. 그 소원을 제일 빨리 이룰 뻔한 사람은 큰 형이었다. 젊은 시절 어머니 속 꽤나썩인 큰 형은 군 제대하고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 떤 건설회사 소속으로 사우디 파견근로자로 떠나게 됐다. 그리고 얼마 안 돼서 한 통의 국제 우편이 우리 시골 집에 도착했다.

빨강 색과 남색으로 된 짧은 사선이 교차하며 봉투 가장자리를 삥 둘러 장식한 국제우편 봉투는 그냥 손에 들고 다니기에도 멋있어 보였고 뭔가 좀 있어 보였다. 큰 형은 사우디에서 보낸 이 국제우편 봉투에 ‘어머니 전상서’와 함께 어머니 틀니에 쓰라고 약간의 현금을 보내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큰 형이 보내 준 이 돈을 좀 아껴 보려고 어머니는 돌팔이 치과의사에게 돈을 주고 말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다 겨울 방학을 맞아 고향 집에 돌아와 보니 완성된 틀니가 도착했는데 이게 전혀 우리 어머니 잇몸에 맞지 않았다. 어머니는 음식을 씹을 때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 아예 그 틀니를 사용하지 않고 따로 보관 하고 계셨다.

게다가 그 돌팔이는 잇몸 본을 뜨는 과정에서 그나마 성한 잇몸마져 건들어 놓아 어머니는 고통속에 누룽지나 죽만 드시고 계셨다. 눈치를 보느라 크지 않은 방안 조그만 밥상을 사이에 두고서 어머니는 입이라도 크게 벌려서 숱가락질을 하실 때는 옆으로 살짝 비켜서 드시곤 했다.

내가 집에 돌아온 지 둘 째 날 아침 어머니의 이런 모습에 나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시다가 누룽지 훑으러 가신다며 막 밥상에서 일어나시려는 어머니를 멈춰 세우고는, ‘엄마 그 돌팔이 지금 어딨어? 누가 엄마한테 그 돌팔이 소개했어? 그냥 치과에서 하시라니까는.“

2.조력자, 안점수

나는 어머니의 고통스러워 하시는 모습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돌팔이를 찾아가 돈이라도 되찾아와야 어머니도 나도 맘이 좀 편해질 것 같았다. 내가 어머니를 타박하면 할 수록 어머니는 더욱 더 미안해 하는 모습을 보이며 “아, 그 망할놈의 성동떡만 아니었어도 이 사단은 안났을 텐디. 쯧.”하신다.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성동떡이라니? 자세하게 얘기 좀 해봐요?”

“아 글씨, 내가 네 큰 형이 보내 준 편지 얘기 끝에 틀니를 해야것는디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니께,  ‘성님, 뭣하러 비싸게 병원가서 헌다요. 지가 싸게 잘하는 사람 소개해줄 텐께, 그 사람헌테 허씨요. 사실 요너메 두동마을 사는디, 내 장조카요. 아주 잘헌당께요’ 이러더란 말이다.”

나는 어머니로 부터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두동’ 마을이 어디쯤 인지 어머니께 물어서 대충 머리속에 채워 두고는 바로 교련복으로 갈아 입었다. 사실 그날 눈 오는 추운 날씨를 생각하면 교련복은 어울리지 않는 룩이었다.

하지만 입으면 나름 절도 있어 보이고 의젓해 보여 17살 고등학생이 조금이라도 강해 보이도록 하는데는 그럴 듯한 복장이었다. 나는 얼룩 무늬 교련복에 큰 형이 버리고 간 낡은 군화를 마루 밑에서 찾아 신고는 점수네 집으로 뛰었다. 사실 나는 키에 비해서 손발이 좀 큰 편이라 큰 형의 군화가 고등학교 1학년 내 발에도 크지 않고 신을 만 했다.

점수는 산 너머 마을 어딘 가에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와 의붓어머니 그리고 배 다른 어린 동생들 틈에서 눈칫밥 먹으며 살고 있었다. 그래서 점수는 피 붙이 누나가 살고 있는 우리 동네에 국민학교 때 부터 방학 때만 되면 꼬박 꼬박 찾아왔고 우리는 초등학교 언제가 부터 방학 때만 되면 단짝으로 붙어 지냈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는 집을 떠나 학교 근처에서 자취 하게 됐는데, 나는 2학 때부터는 방학 때가 돼서도 고향 집에 잘 오지 않으면서 점수와는 헤어지게 됐다. 그 때는 아직 고등학교 1학년 때라 1주일 정도는 고향 집에 돌아와 보내던 때였다.

이번 겨울 방학 때도 점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누나네 집을 찾아온 것이다. 내가 점수네 누님 집으로 막 출발하려 하자 어머니는 찐 고구마 몇 개를 보자기에 싸 주셨는데 한창 먹을 때인 두 명의 장정이 점심으로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무게였다.

“점수야, 안점수? 집에 있냐?”

“어, 오복이. 언제 왔냐?” 점수가 안방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점수 매형과 누님도 어린 딸에게 밥을 먹이면서 열린 문틈으로 얼굴을 내밀어 내다보며 반갑게 맞아 줬다.

“아이고, OO아재, 안녕하세요?

점수하고 어디 좀 다녀 올 데가 있어 지금 같이 나가려고 하는데 괜찮을 까요?

점수야, 밥 다먹었으면 나좀 보자.”

“응. 알았어. 내 방으로 가 있어. 곧 건너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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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야, 너 혹시 교련복있냐? 있으면 그걸로 갈아입어라.”

“뭐, 교련복! 없는데. 집에서 안가져 왔지.  교련복은 왜?”

“그럼, 네 매형 예비군복으로라도  갈아입어. 이유는 가면서 설명해 줄께. 시간이 없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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